
살 만큼 살았다고 말하는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보통 삶이 잔잔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열정도, 심장을 흔드는 감정도 어느 정도 지나간 뒤라고 믿죠.
하지만 가끔 인생은 그 모든 예상을 아주 유쾌하게 뒤집어 버립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처음 들으면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속담의 진짜 의미는 생각보다 깊습니다.
낡은 집에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듯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음에 한 번 불이 붙으면 그것 역시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는 뜻이죠.
게다가 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불은 대부분… 끄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기름을 들고 뛰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은퇴 후 등산복이 거의 일상복이 되어버린 어느 평범한 아버지, 어쩌면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최 부장님’ 같은 분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이면 단톡방에 꽃 사진과 좋은 글귀를 보내고, 주말이면 산을 오르고, 특별한 일 없이 조용히 하루를 보내던 그런 평범한 삶입니다.
겉으로 보면 차분하고 안정된 인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마음속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오래된 한옥과도 비슷합니다.
수십 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단단해진 기둥, 세월 속에서 습기는 빠지고 건조해진 나무들처럼 그 마음 역시 많은 시간을 지나며 조용히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구청 문화센터의 라인댄스 교실일 수도 있고, 동네 공원의 산책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평범한 모임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한 번 눈이 마주칩니다.
아주 짧은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불꽃은 스파크가 아니라 용접봉처럼 강렬합니다.
젊은 시절의 사랑은 종종 가스레인지 불과 비슷합니다.
켜기도 쉽고, 끄기도 쉽죠.
하지만 나이가 들어 시작되는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마치 아궁이 속 장작불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아오르지만,
한 번 제대로 붙기 시작하면 그 열기가 아주 깊고 오래 갑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의 기둥 깊은 곳에서부터 불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눈에 잘 보입니다.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의외로 작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카카오톡 프로필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설악산 정상에서 찍은 풍경 사진이던 프로필이
어느 날 갑자기 밝게 보정된 셀카로 바뀝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문구 대신 “그대를 만나 내 삶은 다시 봄” 같은 문장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돋보기 안경을 살짝 올려 쓰고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글자를 수정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
어쩌면 젊은 시절 연애편지를 쓰던 때보다 더 진지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이쯤 되면 가족들은 조금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어디 아프신 건가?”
“혹시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답은 단순합니다.
그저… 마음에 불이 붙은 것뿐입니다.
그것도 꽤 크게 말입니다.
불이 붙은 오래된 집은 보통 간단한 수리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대신 거의 재건축에 가까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향수를 뿌리고, 새로운 옷을 입어봅니다.
평생 입던 통 넓은 등산바지 대신 슬림한 청바지를 입어보기도 합니다.
뒤에서 보면 스무 살 청년 같은데 앞에서 보면 익숙한 아버지의 얼굴인
그 묘하고도 귀여운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모습을 보며 나이 들어서 하는 사랑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주책이라거나, 노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불꽃은 사실 파괴의 불이 아니라 생존의 불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달리고 직장에서 수십 년을 버티며
이미 마음이 다 타버린 것처럼 보이던 사람에게도
사실은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 하나가 조용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불씨가 다시 타오를 때 사람의 표정도, 걸음걸이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무릎이 덜 아픈 것 같고, 아침이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고,
삶이 다시 조금 밝아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이것이 사랑이 가진 묘한 힘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불은 보통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낡은 집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혹은 그 열기로 집이 새롭게 단장될 때까지 조용하지만 뜨겁게 계속 타오릅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제 나잇값 좀 하라”고 말해도 이미 불길은 지붕 위로 올라가 버린 뒤입니다.
말리면 말릴수록 오히려 더 크게 타오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이 황혼 로맨스가 가진 묘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약 어느 날 주변에서 그런 불붙은 낡은 집을 보게 된다면
억지로 끄려고 하기보다는 잠시 따뜻하게 바라봐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 불꽃은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한 사람이
자신에게 허락한 마지막 축제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