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어느 낡은 빌라 옥탑방, 차가운 달빛만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던 깊은 밤이었습니다.
원고지 더미에 파묻혀 잠든 한 남자의 방에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서랍을 뒤지러 온 '도둑'이었죠.
도둑은 숨을 죽인 채 삐걱거리는 책상 서랍을 하나둘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침대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는 줄 알았던 집주인이 상체를 일으키며 배를 잡고 껄껄 웃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당황한 도둑은 칼을 치켜드는 대신 멍하니 물었습니다.
남자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습니다.
"이보게, 친구. 그 서랍은 내가 오늘 낮 내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도 샅샅이 뒤져봤던 곳이라네.
그런데 동전 한 닢, 쌀 한 톨 나오지 않았지. 그런데 자네가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뭘 찾아내겠다고 그리 열심히인가?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네."
남자의 목소리에는 조롱이 아닌, 묘한 해탈과 동질감이 섞여 있었습니다.
도둑은 허탈함에 빠졌습니다. 훔
칠 게 없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수고가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것을 집주인에게 '인증'받은 셈이니까요.
도둑은 혀를 차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도둑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도둑은 어이가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쏘아붙였습니다.
"가져갈 것도 하나 없는 빈털터리 방인데, 문은 뭐 하러 닫으라는 거요?
설마 다른 도둑이 또 들어올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 남자는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이 일화는 단순히 가난한 작가의 궁색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 닥친 '결핍'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죠. 우리는 흔히 내 서랍이 비어있을 때 불안해하고,
누군가 그 빈 서랍을 들여다볼까 봐 문을 굳게 걸어 잠급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달랐습니다.
남자의 웃음은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나옵니다.
비극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기보다
하나의 상황으로 인정해 버린 것이죠. 문제가 닥쳤을 때 "왜 나만 이럴까?"라고 묻는 대신,
"그래, 내 서랍은 비었어. 그게 팩트지!"라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는 엄청난 내공입니다.
도둑에게 문을 닫아달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 이야기의 백미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경계, 즉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외부의 침입(도둑)보다 나를 더 괴롭히는 건 내부의 냉기(밤바람)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칼을 든 도둑을 말 한마디로 허탈하게 만들어 돌려보내는 힘은 논리도, 폭력도 아닌 '유머'였습니다.
유머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긴장감을 한순간에 녹여버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세상이 당신의 빈 서랍을 비웃을 때, 당신은 그 세상의 어리석음을 향해 미소 지으십시오.
문은 꼭 닫아달라는 당당함과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