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동창회 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성공을 자랑하고, 누군가는 사는 게 팍팍하다며 쓴 소주를 들이켜던 중이었죠.
그때, 꽤 오래 술잔만 만지작거리던 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습니다.
시선은 그 시절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훔쳐보았던,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된 그녀를 향해 있었습니다.
"있잖아, 나 사실 궁금한 게 있어. 그때 수업만 끝나면 내가 맨날 너한테 가서 질문했던 거 기억나?
사실 나 그거 다 아는 내용이었거든. 근데 왜 굳이 너한테만 물어봤는지 알아?"
그의 목소리엔 수십 년을 묵혀둔 소년의 떨림이 묻어 있었습니다.
좌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친구들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고백'이라는 단어가 술잔 위로 둥둥 떠다녔고, 그녀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웃어주길 모두가 기다리던 찰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수줍어하지도, 그렇다고 당황하지도 않았죠. 그녀는 무심한 듯 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나지막이 되물었습니다.
"그럼 넌, 내가 왜 쉬는 시간마다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늘 그 자리에만 앉아 있었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순간, 왁자지껄하던 공기가 차갑게 식었습니다.
폭소를 터뜨릴 준비를 하던 친구들도, 술잔을 입에 대려던 이들도 멈춰 섰습니다.
그녀의 질문은 그의 고백보다 훨씬 더 무겁고, 훨씬 더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질문을 핑계로 그녀 곁을 맴돌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을 받아주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휴식 시간을 기꺼이 반납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같은 곳을 향해 있었지만, 정작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기엔 당시의 우리는 너무나 서툴렀고 겁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정서에는 '은근함'과 '기다림'이라는 미덕이 있습니다.
서구적인 사랑이 뜨거운 고백과 쟁취라면, 한국의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상대가 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배려에 가깝습니다.
그녀가 자리를 지켰던 것은 일종의 '침묵의 초대'였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머무는 그녀의 마음까지는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늘 내가 내민 손에만 집중하느라, 상대가 그 손을 잡기 위해 얼마나 오래 멈춰 서 있었는지는 잊고 삽니다.
이 에피소드가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엇갈린 자리'가 하나쯤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조용히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곤 합니다."
이 문장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소중한 것일수록 요란한 경고음 없이 사라집니다.
돈이나 명예는 잃기 전에 신호가 오지만, '사람의 마음'과 '타이밍'은 그렇지 않습니다.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동창회의 술잔 속에 녹아버린 얼음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진 뒤입니다.
우리가 놓친 것은 그 시절의 '그녀'나 '그'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놓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심을 온전히 쏟아부을 용기'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