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이 발아래 노닐고 청아한 학의 울음소리가 들릴 듯한 어느 깊은 산자락,
그곳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위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한 선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살아있는 부처'라 칭송했고, 그의 뒷모습에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죠.
어느 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산을 오르던 한 청년이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선사는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죠. 청년은 무릎을 탁 치며 생각했습니다.
'과연, 저 경지에 이르러야 세상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구나!'
청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스님, 어찌하여 매일 이 험한 날씨에도 네 시간씩이나 앉아 계십니까?
그 시간 동안 어떤 심오한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시는 건지, 혹시 저 같은 중생도 따라 할 수 있는 비법이 있습니까?"
선사는 천천히 눈을 뜨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는 마치 온 세상을 품을 듯 자애로웠죠.
"허허, 비법이라 할 것까지는 없네만... 굳이 말하자면,
처음 두 시간은 내 마음속에 쌓인 시기, 질투, 분노 같은 세속의 먼지를 씻어내는 데 쓴다네.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내가 보이기 때문이지."
청년은 감탄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럼 마음을 다 비워낸 나머지 두 시간 동안은 어떤 무아의 경지에 머무시는 겁니까?
혹시 신선과 대화라도 나누시는지요?"
그러자 선사가 고통 섞인 신음과 함께 다리를 비틀며 대답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처음 두 시간 지나고 나니 다리에 쥐가 너무 심하게 나서,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더군.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쉬어야 해서 그냥 앉아 있는 거라네.
안 그러면 고꾸라져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질 텐데 어쩌겠나?"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이나 완벽해 보이는 타인을 보며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비법'이나 '강철 같은 의지'를 가졌을 거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선사의 고백처럼, 숭고해 보이는 인내의 절반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버팀'이자 '회복을 위한 강제 휴식'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 업무를 시작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하기 전, 우리에게는 '마음의 먼지'를 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제의 후회, 오늘의 걱정, 카톡 알림으로 분산된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이죠.
이 '비워냄'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관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기계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인간미는 선사가 고백한 '나머지 2시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목표를 향해 달리다 다리에 쥐가 난 것처럼 마음에도 쥐가 날 때가 있습니다.
번아웃이 오고, 열정이 식고, 도저히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것 같은 순간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시간을 '정체기'나 '실패'라고 부르지만, 선사는 그것을 '천천히 쉬어야 하는 시간'으로 정의했습니다.
억지로 일어서려다 굴러떨어지는 대신,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나를 지키는 고도의 전략인 셈입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유독 '쥐가 난 상태'로 뛰라고 강요하곤 합니다.
다리가 저려도 정신력으로 극복하라 하고, 쉬는 것을 죄악시하기도 하죠.
하지만 선사의 재치 있는 반전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못 일어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다리에 피가 통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